‘정상성’이라는 쇠사슬을 벗어 던져버리고 미친 여자들에 대하여

원래도 이 사회의 ‘정상성’에 진절머리가 났던 나는 책을 덮을 즈음 ‘정상성’이라 불리는 가부장적 잣대에 신물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는 가만히 참고 살지만 않겠다고, 평생을 ‘예민하고 유별난 애’로 살아온 나라는 인간의 행적을 지우지 않고 지켜가기로 했다.

이 과격하면서도 치밀하고 과감하며 섬세하기까지 한 텍스트들이, 아니 마녀들이 내게 주문을 건 것이 틀림없다. 다음 챕터로 넘어갈 때마다 나는 ‘예민하고 유별나다’는 이유로 정체성이 쉽게 구겨지고 짓눌린 채 살아온 나 같은 다른 여성들과 나를 위해 시끄럽고 유난 떨며 살겠다는 소망 내지는 다짐을 가슴 속에 조심스레 품었다. 마녀들의 주문이 일으킨 열의로 가득 찬 소란과 소동은 뒤로 미룬 채 읽는 내내 떠오른 단상과 깨달음, 설렘과 흥분을 누군가 알아채 이 마음을 가로채지 못하도록 마음 한편에 고이 넣어 빗장으로 걸어두었다.

책은 4부로 구성돼 있다. 마녀를 위한 변론, 미친년들의 이야기, 집안의 마녀들, 반란의 정치. 목차만 봐도 글을 쓴 자들의 심장에서 타오르는 열기가 느껴졌다. 그들은 어느 누구도 자기들의 이야기를 해주지 않자 그들만의 언어로 직접 말하기로 했다. 글은 그런 마녀들의 분노, 탄식, 안타까움, 열정, 슬픔, 정의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당신은 마녀와 광녀의 차이에 관해 사유해 본 적 있는가. 죄도 없는데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비극의 역사 속 여성들이나 극복할 수 없는 사건을 겪고 이성을 통제하는 능력을 잃어 흔히 말하듯 ‘정신을 놔버린’ 여자들 말고, ‘정상성’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질서를 휘젓고 다니다 ‘마녀’ 혹은 ‘광녀’로 낙인 찍힌 여성들 말이다. 이 여성들은 과거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버젓이 우리 곁에 존재한다.

책을 읽으며 ‘정상성’의 규범을 강요하고 거부하면 낙오자 혹은 광인으로 낙인 찍는 이 사회의 작태에 관해 나는 슬픔과 안타까움만 느낀 게 아니다. 그 속에서 피어나는 분노에서 추진력을 얻었다.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 늘 마음 깊이 의심하던 바를 확신하게 됐다. 사회는 ‘비정상성’의 표본 그 자체다. 여성들에게 유별나다며 주홍 글씨를 새겼던 이 사회는 사실 ‘정상성’을 가장한 폭력을 휘두르며 수많은 피해자를 유린해 오고 있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여성을 입맛에 맞게 휘두르기 위해 ‘정상성’이란 철칙을 앞세워 온 사회는 그 뒤에 숨어 분노와 열등감, 두려움, 권력욕으로 점철된 ‘비정상성’의 험악하고 추한 민낯을 감추고 있었다.

사회는 어떤 식으로 여성들을 회유하고 유린해 왔을까. 책은 그간 소상히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들의 지워진 역사를 가감 없이 드러내며 능욕에 능한 이 사회의 교묘한 술법이 어떻게 발전돼 왔는지 책 전반에 걸쳐 끊임없이 일러주었다.

우선 ‘히스테리’에 관해 얘기하고 싶다. 남성보다 여성에게 훨씬 쉽게 붙여졌던 그 증상 혹은 낙인에 관해서 말이다.

광기-19세기에 흔히 히스테리로 불림으로써 여성적 질병으로 간주되고, 20세기 들어서는 우울 혹은 불안이라는 진단명을 얻은-는 ‘사회에 대해 수동적이고 내면 지향적이며 궁극적으로 자기파괴적인 거부를 표현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리스어로 ‘자궁의 이동’을 뜻하는 히스테리아(Hystera)는 오랫동안 여성적 질병으로 인식돼 왔다. 프랑스의 신경학자 장-마틴 샤르코에 의해 히스테리 진단이 자궁과 관련이 없다는 것이 밝혀졌고, ‘전쟁 싱경증’ ‘폭력에 의한 광기’와 같은 남성 히스테리(나운규의 <아리랑>에 등장하는 미치광이 영진이나 이청준 소설에 등장하는 폭력에 희생된 남성들)에 대한 논의들이 이루어진 지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히스테리는 여전히 일부 ‘민감한’ 여성들의 질병으로 치부되고 있다. 또한 현실적으로도 여성 우울증이 남성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 통계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이에 대해 크리스티나 폰 브라운은 ‘서양 의학과 과학의 역사는 무질서한 형식을 모두 배제하는 경계 짓기의 역사, 규범과 정상성(육체, 자연, 성의 정상성)을 추구해 온 역사’가 ‘무질서 그 자체인 비정상성’에 이름을 붙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렇게 해서 정상성으로 분류될 수 없는 모든 것들은 ‘히스테리’로 불리게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남들과 다른 의견을 뚝심 있게 관철하는 이들에게 ‘히스테리’를 부린다는 말이 붙는다. ‘히스테리’는 개인이 오로지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환경에 있을 때보다 다수에게 짓밟히고 오인되기 쉬운 집단 내에서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 ‘히스테리’를 가진 이들은 어떤 집단 내에서 다른 이들이 비웃음과 경멸로 위협할 때조차 자신의 언어와 생각을 굽히지 않는다. 그들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기 위해 예민하고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도 말이다. 그러나 모든 위협과 수난 끝에 그들이 얻는 것은 ‘히스테리’라는 멸칭이다.

‘히스테리’는 정녕 이해하기 어려운 예민함과 그에 따른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만을 일컫는 걸까? 이에 관해 책은 이렇게 말한다. “히스테리는 결국 타자의 요청에 대한 발작적 거부이며, 불안과 공포의 발로이다. 과대망상이나 피해망상으로 이어지는 이 징후들은 나르시시즘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 맺기의 실패이고, 고립과 은둔의 결과이다.”

역사의 기록에도 남성보다 여성에게서 더 자주 발견됐다는 ‘히스테리’ 증상은 현대까지도 동일한 양상을 띠고 있다. 남성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언제나 바닥이었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거부를 끊임없이 경험한 여성들에게 ‘히스테리’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방어 기제인 동시에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타인을 넘어 세상과 관계를 맺는 데 처참히 실패한 결과의 증거였다.

이처럼 규범과 정상성을 벗어난 여성들에 관한 편협한 정의의 역사는 당신의 생각보다 훨씬 오래 지속돼 왔다.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성찰한 것처럼, 남성의 거울에 위험하거나 불필요하게 비춰지는 여성성들은 마녀와 광녀의 형상으로 그려져 왔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물론 얄팍한 멸칭에 여성들을 묶어둔 건 비단 ‘히스테리’뿐만이 아니다. ‘모계유전’도 주장에 비해 한없이 빈약한 근거를 가졌으나 가부장적 사회에서 ‘주류’들의 지지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지독히도 오랫동안 여성들의 자아에 말뚝을 박아 왔다. 심지어 ‘모계유전’을 작동시키는 원리에 유전학적인 관계가 전혀 없다는 근거가 증명된 이후에도 늘 그래왔다.

화살이 갈 곳을 잃으면 어떻게 될까. 질서가 뒤틀리고 뒤집어진 세계 안에서 여성들의 화살은 자신을 향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거대 권력에 맞서 목소리를 높일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부정과 분노의 목소리를 내는 순간 주홍 글씨가 더 선명하게 찍히리란 걸 이 사회에서 체득한 동물적인 감각으로 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규범과 정상성을 추구해 온 역사’는 누구에 의해 정의됐는가. 아마 높은 확률로, 늘 그래왔듯 수많은 여성에게 낙인을 찍고 그들을 세상의 가장자리로 물러나게 한 ‘그 사회’의 작품일 것이다. 그러나 21세기를 사는 여성이자 역사 속 벼랑 끝으로 내몰린 여성의 자리 한가운데를 지킨 인물들을 기억하는 한 인간으로서 내가 아는 한 사회는 남성을 위한 정의와 설명을 끊임없이 생성해 오며 그것들에 인류애, 인간성이라는 명목으로 한없는 자비를 베풀어 온 데 반해 여성에겐 그런 연민을 베푼 적 없었다.

한쪽에서 남성들이 세상에 소속되고 이해받으며 이름을 부여받아 갈증을 해소하는 동안 다른 한쪽에선 바닥을 기어 다니며 자신들을 위한 자리와 이름의 조각을 더듬더듬 되찾으려는 여성들이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 사회는 정말 ‘무질서 그 자체인 비정상성’에 이름을 붙이지 ‘못’했던 걸까. 우린 그 결백을 믿을 수 있을까. 당신의 동물적인 감각, 그러니까 마녀의 피를 믿어야 한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약자인 여성을 찍어 누르며 노예 근성과 체념에 대한 학습 감각을 주입시켰다. 이제 어렴풋이 답이 보이는가. 남성 중심적 사회는 고의적으로 여성에 한정해서만 비정상성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우리는 남성들이 가졌던 ‘정상성’과 ‘주류’의 자리를 그렇게 빼앗겼다.


다만 히스테리를 무조건 처벌과 배제의 현장으로만 볼 수 없다. 여성들이 불가피한 이유로 히스테리를 받아들이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시대의 격변 속에서도 늘 자기 실존의 의미를 주체적으로 성찰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어떤 인간으로, 또 여성으로 살아갈지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감각하고 스스로에게 상기했다. 놀랍게도 그들이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사회에 맞서기 위한 도구로 선택하고 활용한 것은 바로 ‘히스테리’였다.

그러나 근대의 가장자리에서 신경증적으로 발화하는 여성 히스테리를 처벌과 배제의 현장으로만 볼 수는 없다. 히스테리는 ‘수동성’ ‘의지없음’ ‘자아부재’ ‘나약함’ ‘불안’ 등으로 설명될 수 있으나, 근대 규율이 가리키는 ‘대문자 자아'(완전성의 전능한 양성의 추상적 자아)가 아니라 ‘소문자 자아'(육체적이며 불완전한 자아)를 선택한다는 점에서, 또는 ‘기억을 선택한다’는 측면에서 ‘거부의 형식’이자 항의를 뜻한다.

‘히스테리 환자들 가운데 정신이 아주 명료하고 의지가 강하며 성격이 아주 분명하고 비판정신이 강한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라는 브로이어의 지적이나 31명의 20~30대 여성을 인터뷰함으로써 우울증에서 ‘고통을 호소하며 자기 이야기를 하는 여성들, 즉 자기 삶을 살아가려는 여성들’을 읽어내는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의 시도는 ‘미친 여자’가 박약이나 순종이 아니라 주체성의 의지와 ‘거부’의 표식임을 예증한다.

‘미친 여자’, ‘마녀’, ‘광녀’에 대한 고정관념을 벗어난 해석과 정의는 오래 전부터 등장했다. 하지만 늘 주류의 반론에 부딪힌 탓에 지금까지도 사회에는 고정관념의 잔상이 짙게 남아 있다. 이제는 그들에 관한 정의의 범위가 확장돼야 할 때다.

미디어를 포함한 여러 매체에서 스스로 히스테리를 선택하고 마녀가 되기로 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다뤄지는 빈도가 전보다 늘었다는 점은 분명 주목할 만한 현상일 것이다. 이는 여성 인권 향상을 위한 치열한 운동이 이룩한 결과이기도 하다. 아직 가족중심적, 가족우선적 분위기를 추구하는 미디어, 영화, 드라마가 주류를 이루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주체성을 강하게 회복하고 잃어버리거나 빼앗긴 것을 주도적으로 되찾으려는 여성상도 전보다 많이 등장하고 있다. (그렇지 않은 작품들도 있지만, 가족중심적 메시지로 각광받는 대부분의 작품들은 특정 인물의 회복이나 행복이 온전히 보장되지 않은 채 흐지부지 끝난다는 점에서 여러 의문을 남긴다.)

그러나 다양한 여성상을 그려내려는 미디어의 시도에도 규범을 벗어난 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여전히 비주류에 머무르고 있다. 이런 비주류 소재를 주로 소비하는 대중에게서 명확한 특징이 포착되는데, 바로 그 대중이 대게 여성이며 이에 따라 그들이 소비하는 미디어가 여성들의 욕망을 반영해 점점 더 비주류적인 형태를 띤다는 것이다. 책은 이와 관련해 막장 드라마를 예로 들며 현대의 ‘합리성’이라는 여성에게 불평등한 현실이 그들의 자리를 계속 사회 외곽으로 밀어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들 막장드라마가 ‘혈연’과 ‘사랑’과 ‘돈’을 권력으로 내세우면서 ‘가족 내 갈등’을 증폭시키고 봉합하는 것은, 그것이 ‘전업주부’에게 주어진 현실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성별분업에 의해 가족으로 제한된 여성은 사교육, 부동산, 재테크와 자녀 결혼에 개입하며 존재의 능동성을 확인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한다.

그 제한된 욕망의 실현과 대리만족이 막장 드라마의 숱한 악녀와 마녀들, 그리고 합리적 세계관과 무관한 플롯을 낳게 되는 것이다. 감정 과잉과 신파, 그리고 비현실성, 판타지가 여성 약자의 것으로 지목될 수밖에 없는 것은, 근대 합리성이라는 현실이 그만큼 촘촘하고 강력하게 이들의 자리를 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비주류가 여성, 즉 약자의 것으로 지목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회가 정한 ‘남성적’ 주류의 몸집이 비대해짐에 따라 비주류가 계속 세상의 외곽으로 밀려나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막장 드라마, 신파에 대해 코웃음을 치고 내려다보는 게 ‘주류’라지만 그 비정상적인 이야기에 울고 웃으며 대리만족을 느끼거나 현실에서 해소되지 않는 응어리를 마음껏 풀어 헤치는 ‘비주류’ 여성들에겐 그 이야기가 낙원이자 대나무숲, 해방일 수도 있다. 더 많은 비주류에 대한 포용과 이해가 절실한 이유다.

하지만 ‘비주류’가 남성 중심적 사회가 정한 ‘정상성’의 범주를 벗어난다는 이유로 그것에 대한 공식적인 논의는 소극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더 나은 사회를 꿈꾸기 위해서는 다양성이 인정받고 보장되는 공공 담론의 장이 필요하다.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여성상의 다양화를 위해서는 공식적인 장에서의 적극적이고 활발한 담론이 선행돼야 한다.

반면 비주류적 작품이 주류가 되는 진귀한 사례도 있다. 바로 한강의 ‘채식주의자’다. 난해하다는 논란이 잇따랐던 ‘채식주의자’는 비주류에 의한, 비주류를 위한 이야기지만 작품의 위대함을 인정받아 주류로 부상한 사례로 꼽힐 수 있다.

특히 “소수자 및 타자를 중심으로 보자면 문학은 한없이 ‘선량한’ 채로 차별주의를 내내 반복하거나 부지불식간에 차별과 억압과 혐오를 강화해버리기도 한다”지만 ‘채식주의자’는 이 같은 문단의 고질적인 문제에 과감하게 맞선 작품이기도 하다.

‘채식주의자’에서 영혜는 자신의 광기를 주변에 전염시킴으로써 ‘주류’인 남성조차 ‘비주류’로 진입시키는 데 성공한다. ‘채식주의자’의 ‘미친 여자’ 영혜는 자신의 광기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주위를 성공적으로 감염시킴으로써 ‘광녀’의 힘을 각인시킨다. 또 결과적으로 ‘미친 여자’가 어떻게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존재로 거듭나는지 보여주며 그 앞에서 ‘주류’는 흔들리거나 삶이 송두리째 바뀌는 것 외 별다른 수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광기는 억압된 무의식이 풀려난 곳에서 자유롭게 질주한다. 의식이 사회적 차원에서 마련된 합의를 내면화하여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유지될 때 무의식은 그것을 통제하는 대타자로서의 사회적 규범을 초과하며 자아의 욕망을 폭로한다. 이때 인간은 그 욕망과 야생성과 비규범성에 의해 동물의 차원으로 진입한다.

‘미친 여자’가 핵심 인물인 ‘채식주의자’가 시사하는 여러 메시지 중 하나는 이런 것이다, ‘미친 여자’ 앞에서 혐오를 느꼈다면 이미 감염된 것은 아닌지 혹은 자신이 처음부터 미친 건 아니었을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 무언가를 싫어할수록 우리는 그 대상과 닮아가거나 이미 닮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우리는 흔히 ‘동족 혐오’라고 부르지만 알고 보면 처음부터 혐오 대상과 나는 동족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나도 모르는 새 감염돼 동족이 된 걸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은 너무나 쉽게 의심을 건너 뛰어 곧장 확신으로 향하는 ‘동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주장에 더 힘이 실린다.


‘미친 여자’들이 광기의 날갯짓으로 남긴 건 황급히 도망치듯 떠난 뒤 땅바닥에 버려진 깃털뿐만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날갯짓이 이는 바람과 깃털 끝자락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삶이 송두리째 변하는 경험을 한다. ‘미친 여자’들은 자신을 상처 입힐 만큼 한계를 초과한 열정, 광기의 전염 등을

[희숙]에서는 자신이 아닌 다른 여성, 바로 조카를 위해 ‘히스테리’를 ‘선택’하고 삶의 최후까지 가져감으로써 마녀로서 지위를 버리지 않은 여성이 등장한다.

매섭게 쏘아붙여 아이를 울리지 않고는 못 견딜 만큼 마녀는 자기 인생, 아니, 여자들의 인생에 화가 나 있었다. 싸울 줄 모르는 불행한 여자들, 불행이 불행인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여자들을 향한 희숙의 분노와 슬픔은, 그 무게만큼이나 희숙을 괴팍하게 보이게 만드는 비밀이 되어갔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희숙이 누군가와 시시비비를 가리며 자주 시비가 붙었던 것은. 상대를 향한 매서운 저주를 쏘아대는 자신을 볼 때마다 손을 슬쩍 빼 뒤로 물러서려던 조카를, 희숙은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 그 손을 더 꽉 붙잡았을 것이다. 괴팍해져야만 지킬 수 있는 세계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게 고작 희숙만의 비밀일까?

생애 내내 ‘유별난’ 자신을 향한 온갖 비웃음과 오해를 견디며 세상에 맞서 뜨겁게 싸우던 ‘마녀’ 희숙은 병마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삶의 끝자락까지 싸웠다. 그러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들락날락하는 바람에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고 말까지 잃어 어린아이가 됐을 때조차 조카는 그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그는 조카에게 딴 데 쓰지 말고 언젠가 배우고 싶은 걸 배우는 데 쓰라며 돈을 남겼다. 희숙이 조카에게 남긴 건 돈뿐만이 아니었지만 그건 아마 조카에게서 자기 자신의 모습 혹은 그렇게 될 가능성을 봤기 때문이 아닐까.

그 여자는 어떻게 알았을까, 하고. 여자에게 언젠가 반드시 쥐어보고 싶은 지식 조각이 생기리란 걸. 여자가 자기 손으로 지은 안정이라는 환상을, 남은 한 손으로 직접 무너뜨리란 걸. 매 걸음 착실히 헛디뎌서 언젠가 자기 한복판으로 되돌아오리란 걸. 2003년 뙤약볕 아래 서서 무력하게 울고 있던 여자가, 2024년 차가운 국회의사당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 있던 여자로 돌아오리란 걸.

마지막까지 광장에 남아 있던 여자들의 빨주노초파남보 불빛 안에서, 다시 빨주노초파남보 색으로 돋아난 여자의 더벅머리를 보리란 걸. C양과 D양이 되어 여자에 관한 것을 적고 있으리란 걸. 망한 농사. 불길한 징조. 따박따박 다 따지고 드는 년. 투계. 밥맛 떨어지게 하는 년. “걘 좀 유난이야.” 속 “걔”. 그리고 다시 날아오고 있는 여자를 보는, 여자

희숙의 뜨겁고 열정적이던 생애를 상상할수록 그가 마지막까지 마녀로 남기로 한 이유가 납득이 갔다. 세상의 정상성이라는 규범에 갇혀 박해와 거부의 철창에 부딪혀 날개가 수차례 부러진다 한들 마녀들은 그 숨 막히고 좁은 새장에 고립되기보다 미쳐 발광하며 맷집을 키우는 편이 자유로웠을 것이다. 쉽사리 정의되지 못한 세상의 가장자리에, 언제나 그들의 둥지가 있어 왔고 또 지금도 있으므로.

그들은 알았을 것이다. 자기에 대한 편협한 정의에 영혼을 맡기는 순간, 세상이 모두에게 할당한 모양 중에서도 극소수의 선택지(온순하고 착하거나, 미쳐 통제불능이거나)만 부여 받을(낙인 찍힐) 게 뻔하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통제불능’인 마녀들이 두려움을 거둬내고 광기의 날갯짓을 하며 훨훨 날아다니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 속에서 사회가 자비로운 척하며 폭력적으로 부여하는 정의와 그로 인한 잣대를 뿌리친 그들은 비로소 자유롭다.

그런가 하면 여성이라서 겪는 아픔에 대해 직접 목소리를 내며 고통에 스스로 이름을 붙이고 이를 세상에 맞설 용기로 승화한 여성들도 있었다. ‘젊고 아픈/미친 여자들’이다.

거식증은 젊은 여성 사이에서 흔히 발견되는 병이다. 다음 사례에서 일반적인 경우와 다른 점이라면, 해당 사연 속 여성이 자신의 거식증에 자기서사를 부여하고 고통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아픔을 비극으로 고립시키지 않고 세상에 공개했다는 것이다. 그는 거식증에 자기서사를 녹여내 자기를 새로 창조하는 과정을 거쳤고 이를 당당히 세상과 공유함으로써 수많은 여성들에게 공감과 용기를 불어넣었다.

박지니의 ‘삼키기 연습’은 거식증이 진정한 자아를 창조하려는 여성의 광기임을 보여주는 자기서사다……치료에 큰 진전이 없어 20년가량을 거식증 환자로 살아왔지만, 그의 자기서사는 그 자신이 거식증에 상당한 애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거식증은 평범한 자기를 예술가, 연구자, 페미니스트, 인권운동가 등 개성적이고 특별하고 정의로운 자아로 창조하는 전략이다.

임옥희에 의하면, 거식증은 ‘기존 질서와 전통에 순종할 수밖에 없지만 억압적인 질서를 받아들일 수 없는 여성들이 미치거나 아프거나로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히스테리상’이다.

박지니에게 거식증(‘나는 아프다’)은 특별한 자기를 창조하고 페미니스트로서 목소리를 내는 출구 전략이다. ‘파펜하임이나 이다 바우어(프로이트가 저술에서 ‘도라’라는 가명으로 기술했던 히스테리 환자) 같은 여자들과 동류의식 비슷한 걸 느’낀다는 고백은 이러한 판단을 뒷받침한다.

세계의 질서가 남성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형성되며 와해되는 탓에 어떤 아픈 여성들은 어떤 경지에 오르는 모습을 보인다. 자신의 몸을 통해 가부장제와 세계에 대한 반항을 표출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자신의 비좁은 방 안에 커튼을 치고 숨어서 세상에 대한 원망을 자기혐오로 바꾸지 않는다. 대신 아픔과 동행한다. 세계의 불평등, 부당함을 인식한 채 정면으로 맞서서 대치하는 것이 그들의 생존 전략이다. 생애 내내 고통과 공생 관계를 이룬 채 살아가며 거기서 비롯되는 자기만의 무기와 노련함, 말, 행동으로.

아픔을 어떻게 하면 최적의 무기로 쓸 수 있을지 잘 아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이다. 숨는 대신 스스로를 드러내기로 한 아픈/미친 여자들에게서 발견되는 신기한 점은 그들이 맞서기로 한 대상이 같다는 점이다. 그들의 최종 보스맵은 씻을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상처를 안기고는 무력화를 선사해 시간 속에 고립하게 한 세계의 편협하고도 잔인한 ‘정상성'(남성성)이다.

그렇다고 여성들이 지워진 역사에 고통만 있었느냐 한다면 단연코 아니다. 세상을 들썩이게 할 만큼 걸출한 능력을 지녔으나 시대적 흐름과 고정관념에 의해 지워진 여성들의 이야기도 있었다.

몇 년 전 대학원 수업에서 1990년대 여성 시인들의 시를 다시 읽는 강의를 하며 우리 시사에서 여성시가 가장 만개했던 시기가 1990년대였음을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다. 동시에 아직 우리 여성 시인들의 시가 충분히 제대로 읽히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다. 특정한 방향으로만 읽혔거나 어떤 방향의 독해는 무시되어오거나 했던 셈이다.

여기서 시대의 흐름에 반항하듯 등장해 우리 사회에 반향을 일으켰으나 안타깝게도 제대로, 충분히 읽히지 못한 비운의 시가 등장한다.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이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 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 시집이 나왔던 1994년은 아직 1980년대의 분위기가 남아 있고 그 시대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는 문제 의식도 큰 시기였지만 동시에 구소련과 동구권의 몰락, 베를린 장벽의 붕괴 등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을 목격하며 지난 시대에 대한 비판과 반성, 거대 담론에 함몰되거나 은폐되었던 미시 담론의 요구가 폭발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유행을 따라 우르르 1980년대적인 것에서 떠나가던 시절, ‘잔치는 끝났다’는 선언은 바로 그런 시대적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잔치가 끝나고 모두가 떠난 뒤에도 누군가는 남아서 상을 치우고 뒤치다꺼리를 했던 것처럼 시대가 달라졌다고 해도 누군가는 남아서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기록하고 애도하고 후일을 도모해야 했을 것이다.

빛나는 자리가 아니기에 누구도 눈여겨보지도 기억하지도 않았겠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자리, 아니, 사실 역사는 바로 그들에 의해 기록되어온 셈이다. 최영미의 시는 바로 그 자리를 기억하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최영미 시의 태도는 좀 더 주목받을 필요가 있었다.”

학문의 최전선에서조차 여성의 언어는 남성의 언어로 쓰여지고 대체되길 강요받는다. 배울 만큼 배운 사람 사이에 작동하는 위계 질서는 철저히 남성 중심적이다. 같은 지위더라도 여성은 여성만의 방식과 언어를 개진하는 순간 별종 내지는 배척의 대상으로 낙인 찍힌다.

사회에 뿌리내린 남성 중심적 체계는 오랜 시간에 걸쳐 여성의 자리를 좀먹었다. 가부장적 체계가 여성의 자리 위로 꾸준히 가지를 뻗쳐 온 결과는 여성들의 침묵과 남성화다.

이런 남성 중심 구조가 문단이라고 다를까. 모두가 새로운 시류에 이끌리듯 탑승했을 때 최영미는 섣불리 흥분하지 않고 역사의 격변 속에서 진정한 헌신과 희생의 자리를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었다. 그는 지나간 것들을 시간에 맡겨버리는 방식으로 쉽게 작별하는 대신 조명이 꺼진 무대에 남아 남들을 대신해 기꺼이 자기에게 주어진 것보다 벅차도록 많은 일을 해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진정한 문인이자 시인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사회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마녀가 있다면 이곳에도 마녀가 있다. 모든 여성의 존재에 새겨진 흉터의 근원이 시작되는 가정이다.

별 거 아닌 일로 가정의 화목을 방해하는 너무 예민한 ‘나’야말로 이 집안의 ‘마녀’가 아니겠는가? 오늘날 가정 내의 마녀를 판별하는 기준은 단언컨대 ‘예민함’이다. 근세 유럽에서 마녀는 악마와 소통하는 자를 의미했다. 누가 악마와 소통한 자인가? 악마와 소통한 자가 악마와 소통한 자다. (대부분의 마녀재판에서 피고인들은 이미 마녀로 간주되었다) 작금의 가정-정치에서 마녀는 예민한 자를 의미한다. 누가 예민한 자인가? 예민한 자가 예민한 자다.

악마와 소통했다는 이유로 그렇지 않은데도 사회에서 배척될 뿐 아니라 온갖 멸시와 모욕, 죽음까지 감당해야 했던 중세 마녀, 예민하다는 이유로 사회의 바깥으로 밀려나는 현대 여성들. 이들에게는 죄가 없었다. 주위가 이들에게 가하는 가스라이팅과 프레임이 그들에게 없는 죄명을 붙였고 고립시켰다. 세상은 중세 시대를 지나 지금에 오기까지 변한 게 없다. 발전하고, 변화하고, 격변을 거쳤을지언정 여성을 향한 적대와 혐오는 놀랍게도 예나 지금이나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그대로다.

그렇다면 역사 속에서 존재를 부정당하고 빼앗기는 와중에도 자신의 삶을 끝까지 놓지 않은 여성들은 어떤 식으로 생존해 왔을까. 우선 그들에게 삶이란 ‘살아감’보다 ‘버팀’과 ‘투쟁’에 가까웠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매트리스는 비장소로서의 그녀들의 실존을 보여준다. 모든 추방과 배제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매트리스에 누워 웃으며 떠든다. 집(/몸)에서 추방하고 장소를 박탈했다고 해서, 이들의 실존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는 이들을 추방했으나 이들은 추방의 형식으로 공동체에 포함되어 있다. 이들에게 집(/몸)이 없으나 이들의 웃음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웃음이야말로 추방된 타자(의 몸)의 역량을 드러낸다. 이들은 추방되었다고 해서 말소되고 삭제되는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다.

여성의 몸은 세계에서 그 자신의 것으로 취급되지 않고 공공재나 타자의 사유 재산으로서 공유되며 지극히 사적이어야 마땅한 주도권을 빼앗긴다. 하지만 여성은 그런 세계 속에서도 자기자신에 대한 의식을 놓치지 않고 돌연변이로서 존재를 더 강하게 증명해내며 미완의 방식이라 할지라도 그들만의 독자적인 삶을 구축하고 살아가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추방된 자리에서 협소하지만 견고한 그들만의 세계를 건설함으로써 삶의 모양새를 제법 갖추고 살아간다거나, 남성 중심 권력에 의해 수동적이던 삶에서 빼앗겼던 주체의 자리를 정당히 찬탈함으로써 ‘마녀’의 삶을 개진하며 감탄과 놀라움을 안기기도 한다. 미완의 세계에서 여성의 자리는 협소하다. 때로 연대나 대의라는 명목하에 희생까지 불사하는 일이 부지기수인 탓에 겨우 목숨만 부지하듯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에는 여전히 그 열악한 삶을 능가하는 누구도 끌 수 없는 생명력의 불씨가 남아 있다.

책에서 여기까지 무리 없이 당도했다면 우리는 이미 텍스트 속 여성들과 함께 횃불을 들고 금기시되는 영역을 가로질러왔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불온한 성역에서 여느 여성들 못지않게 존재 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정받기 위해 오랜 세월 맨발로 불길을 걸어 온 여성들이 있다. 바로 성노동자들이다.

성노동과 포르노 등 금기시되는 성 영역에 관한 상상력의 지평은 확대되어야 한다. 성노동과 포르노가 당장 사회에 끼치는 표면적인 영향에만 집중할 게 아니라 그것들이 받는 편견과 오해에 결과적으로 영향을 가장 끼친 현재 사회 구조와 성 불평등, 그로 인해 생성된 다수의 편협적인 견해와 차별, 모순, 편견 등까지 살펴봄으로써 ‘불온한 사회’를 이끈 원인으로 성노동자를 쉽게 지목해서는 안 되며 그럴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성노동을 둘러싼 다양한 담화의 최종 목적지는 성노동 근절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의 변화하고자 하는 의지를 동반한 인식과 대화로 상상력을 발휘해 여러 주장과 만나고 접속하며 불온한 사회의 근원이란 어떤 세력의 손아귀에 달려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애써야 할 것이다.

성노동자들이 성노동을 노동이라 말하는 건, 어디까지나 성노동자들도 안전과 생존권, 노동권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는 이미다. 자본주의하에서 성적 거래의 발생이 불가피한 이상, 성노동은 단순히 찬반에 그치는 문제가 될 수 없다. 더욱이 소득과 부채라는 이분법을 넘어 금융자본주의하에서 여성의 몸이 담보화, 증권화의 현장이 된 만큼 ‘개인의 자발성을 논하는’ 일은 그다지 유효하지 않으며 문제의 본질을 은폐한다. 그렇기에 성매매 근절, 축소를 넘어 성산업 자체의 폐기를 주장하는 반성매매 입장에서도 성판매자의 인권 보호와 인권, 불처벌이 우선시되어야 하며 성매매 여성 지원 및 인식, 법제 개선에 힘써야 한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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