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해나 작가의 ‘혼모노’가 한창 애독가들을 넘어 일반 대중 사이에서도 한 번쯤 읽어봐야 할 책으로 소문이 났을 때도 나는 크게 관심이 안 갔다. 밀물처럼 몰려온 유행에 편승해 썰물에 휩쓸려가고 싶지 않아 하는 경향이 있는 데다가 갑자기 혜성처럼 떠오른 무언가에는 항상 의구심부터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 남들보다 한참 늦은 2월, 이 책을 접했다. 뒤늦게 호기심이 일었다. 동시에 여전히 가시지 않은 의구심에 대한 해소 욕구도 들었다.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엔 베스트셀러에 오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문학적 취향의 편차가 큰 애독가들부터 일반 대중까지 사로잡은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너무 어렵지도 편하지도 않은 문장이 불편한 사회적 문제를 날카롭게 꼬집어내고 있었다. 작가는 문제의식과 타협하지 않았고 독자에게 짐을 떠넘기지도 않았다. 다만 질문을 남겼다. 문학의 역할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기 위해 창의성으로 대중의 눈과 귀를 트이게 하는 것. 그래서일까, 개인적으로는 읽으면서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길티클럽: 호랑이 만지기>
길티 플레저는 어떤 일을 할 때 죄책감을 느끼는 동시에 즐거움이나 쾌락을 느끼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다. 길티 클럽에서 활동하는 멤버들은 모두 김곤, 문제의 인물을 옹호한다. 그의 잘못을 알고도 그토록 신봉하는 작품성의 시초인 김곤을 신격화하며 자신들의 ‘고상한’ 취향을 씹고, 맛보고, 즐기며 우월함을 향유한다.
직접 만든 규칙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서 텃세를 부리는 기존 멤버들은 길티 클럽 안에서나마 소속감과 우월감을 느낌으로써 비대해진 자아를 숨길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들은 마치 일종의 권력이라도 잡은 특별한 존재라도 된 듯 우물 속을 두려움 없이 마구 헤엄쳐 다니지만 막상 사회라는 바깥의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는 없다.
사실 그들이 목청 높여 외치던 팬심의 실체는 자신들은 남들과 다르다는 우월감 따위 아니었을까. 현실에서 비롯된 결핍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아름답고 그럴싸하지만 파고들수록 야트막한 예술이라는 이름의 허상을 선택한 것. 예술 자체에 문제는 없지만 거기에 타인의 고통이 묻어 있다면 그건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그들의 팬심은 소멸하는 자아를 모순덩어리 정의감과 우월감으로 채우는 데 쓰였던 것 같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가 하면 ‘나’를 길티클럽으로 이끈 취향에 대한 사유에 깊게 잠기기도 했다. 사실 취향이란 뭐길래 이렇게 사람의 급을 나누기까지 하나, 싶어졌다. 사실 취향 좀 좋으면 배운 사람 대우받고 별로면 무식한 사람 취급받는 게 현실이지 않나. 심경이 복잡해졌다. 그런데 또 취향이 없으면 허전하고 지루한 데다가 세상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이 한정되는 것도 맞는 것 같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사실 취향과 문화를 접목해 사유를 넓히면 생각할 거리는 더 많아진다. 문화는 인간의 삶, 행복과 맞닿아 있다. 그것에 관심이 없어도 삶의 행복과 목적을 찾을 수 있지만 삶을 대하는 태도의 깊이에 차이는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한들 ‘나’의 취향처럼 결핍과 열등에서 시작돼서는 안 될 것이다. 취향을 가진다는 건 다른 말로 나 아닌 세상에 진정 관심을 갖고 사랑, 희망, 꿈 같은 개인의 목적을 위해 미지의 영역을 탐구한다는 건데, 거기에 즐거움과 진실한 관심이 동반되지 않으면 결국 나로 존재하길 멈추고 타인의 그림자로 살거나 그 그림자에 묻어가길 선택하는 셈 아닌가. 그 행위에 대체 무슨 주체가 있고,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나’는 김곤을 신체의 가장 소중한 일부분인 듯 보살폈지만 이따금 찾아오는 이질감을 떨쳐내지 못했다. 김곤은 ‘나’에게 있어 기꺼이 희생과 헌신을 바칠 수 있는 존재였으나 한편으론 ‘나’의 결핍을 충족시켜 준 대상에 그쳤다. ‘나’가 도달할 수 없는 다른 부류의 사람이지만 그를 추앙함으로써 제 결핍을 채우는 것, 그 행위에는 ‘나’의 가장 숨기고 싶은 모습과 ‘나’의 이상향을 간직한 김곤만이 있을 뿐이다.
<스무드>
고국에서 온통 낯선 것을 경험하며 ‘미국인’의 정체성만 남은 ‘나’는 정체 모를 시위에서 만난 노파의 정과 인심에 어떤 구멍이 마침내 채워짐을 느낀다. 구제할 방도를 찾지 못해 방치해 놓았던 구멍은 그의 삶을 그림자처럼 내내 따라다녔던 것이자 소속감, 인정 같은 것이었다.
그는 가문의 사연부터 고국에 대한 역사마저 철저히 범죄마냥 비밀에 부치는 아버지의 완강함에 못 이겨 미국인으로 살기를 강요받았다. 정체성을 정의할 권리에 대한 자율성은 그에게 없었다. 그런 그는 예상치 못한 관광 여정에서 고국의 부끄러운 현실을 마주하지만 무지하기만 하다. 고국의 부끄러운 현실은 그에게 따뜻한 정이고, 인심이고, 난생처음으로 정체성의 방향을 어렴풋이 잡아준 고마운 집단의 정의로운 사회 운동 현장이다.
평생 어디 한 곳에도 깊이 뿌리 내리지 못하고 살아온 ‘나’는 역사의 참상이 연장되는 장면에서 장님이나 다름없다. 그저 구의 표면처럼 ‘스무드’하게, 매끄럽게 그 흐름 속으로 한 치의 의심 없이 녹아 들어갈 뿐. 결국 인간을 이뤄야 했을 것의 오랜 부재는 언제나 그랬듯 그의 지평선까지 근접했다가 어떤 공포도 남기지 못하고 쓸쓸한 행성처럼 떠나버렸다.
그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이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태평하게 지나쳐 왔고 또 앞으로 지나쳐 갈까. 그는 보면 볼수록 어떤 커다란 사건에서 항상 한 발짝 물러서 태평하게 말 얹고 갈 길 가는 사람 중 한 명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처음부터 잊을 각오로 한마디씩 거들고는 뒤돌아서면 유쾌하고 평온한 일상으로 무사고 착륙하는 이들의 얼굴이 빠르게 감기는 필름처럼 스쳐 지나간다.
알 수 없지만, 아주 좋은 하루였어요
-111p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
네. 제가 선생님의 뜻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빛이 인간에게 희망뿐 아니라 두려움과 무력감을 안길 수도 있다는 것을요.
그래서 창이 필요했던 건데…… 저는 완전히 반대로 생각했으니까요.
여재화는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구보승은 화색을 띤 채 말을 이었다.
빛이 공간의 형태를 드러내 조사자에게 두려움을 심고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해 무력감을 안길 거라고.
-192p
일말의 인간적인 사유 없이 목적의 타당성에 사로잡혀 목적을 이루는 데 맹목적인 인간의 손에서 어떤 결과물이 탄생할 수 있는지 볼 수 있는 이야기. 인간이기에 들 수밖에 없는 의문, 부당함 같은 감정의 사유를 철저히 배제한 인간의 창작물은 죽음보다 멀리 가 있고 시체보다 차갑다. 할 말을 잃게 하는 무자비한 사고 흐름에 인간의 냉혹함과 잔인함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 단편.
인간은 인간을 가장 최우선으로 배려한 결과물을 만들지만 인간이기에 그 특성을 잘 알고 있다는 이유로 인간이 살아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결과물을 만들기도 한다. 이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잔혹하고도 어렵고 복잡하지만 동시에 단순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일단 복잡해 보이는 것들도 일련의 체계를 잡고 반복을 거치면 견고하고 단순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악의가 담긴 일에서는 공감을 쓸 일이 없기에 행하는 데 망설임이 없고 더 쉽다.
역사 속 어떤 교란은 그런 식으로 벌어져 왔다. 인간의 영혼에 순식간에 침투해 빠르게 강한 독성으로 감성을 마비하고 고통에 대한 내성이라는 중독 사태를 일으킴으로써 탄생하는 교란종들, 그들은 악을 선으로 믿고 행하며 그에 따르는 사람들의 비명을 필연적인 것으로 여겼다.
그럼에도 그들의 최후엔 일말의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는 걸 소설은 보여준다. 그건 희망도, 절망도 뜻하지 않지만 그들도 한낱 인간에 불과하단 사실을 일깨워준다.
미뤄둔 의문은 장차 주인을 찾아오기 마련이다. 혹은 그림자처럼 그들의 뒤를 밟으며 일생을 추적하거나.
자네는 아직도 그곳이 인간을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하나? 물음에 대한 답을 헤아리며 구보승은 멀거니 서 있었다.
인간을 위한 공간. 설계할 때만 해도 확신했으나 막상 도면이 완성되고 시공에 들어가자 모든 확신이 모호해졌다.
자신이 치밀하게 설계한 것들이 무얼 위함이었는지 자신조차도 알 수 없어졌다.
-201p
<우호적 감정>
나의 다정이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도 있다. 내가 선뜻 건네는 내 다정이 실은 우월감을 동반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들 모두의 결말은 조금 달랐을까.
그러나 내 다정 위에 교묘히 그걸 이용하며 남몰래 자신의 손익을 따지고 취하는 한 수 위 세력이 버젓이 버티고 있었다면? 은밀하게 서로 주도권을 가지려 하는 그 두 세력의 치열한 갈등은 이들의 싸움에서 비롯된 끈적한 관계와 떼 놓을 수 없다. 숨 막히는 먹이 사슬권에서의 우위를 점하기 위한 싸움은 서로 자리를 뺏고 빼앗기며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세도, 온전한 승자도 없는 피 말리는 싸움의 끝은 두 세력을 압도할 또 다른 세력의 등장이거나, 수잔의 말처럼 힘을 빼고 싸움에서 빠져 별종이 되거나 둘 중 하나이지 않을까.
알렉스, 너무 애쓰지 마요. 애쓰면 더 멀어져 -p240
<잉태기>
시부와 경쟁하듯 딸 서진을 키운 ‘나’. 서진은 삶에서 아기를 낳기 전까지 자기 자신이 정한 것이라고는 백화점에서 고르는 명품 같은 사치품 같아 보인다. 아니, 아기를 낳기로 한 것조차 시부와 ‘나’의 등쌀에 떠밀렸다고 봐야 할까. 엄마가 고른 남편과 결혼한 서진이 그 아이를 정말 낳고 싶어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적어도 아이에 대한 모성애는 있었던 것 같다. 아이의 태동을 언급하며 기뻐하는 모습이나 백화점에서 아이가 입을 명품 옷을 가격 생각 안 하고 쓸어 담는 것을 보면 말이다.
시부와 ‘나’는 다르면서도 닮았다. 결핍에서 비롯된 사랑을 자기 자식에게 전부 물려주려고 할 때, 특히 그 방식이 치밀하게 계획적이고 맹목적일 때 그들은 시부와 며느리가 아닌 아버지와 딸 같다. ‘나’는 자신이 시부와 닮았다는 시모의 말에 진저리를 쳤지만 시부도 ‘나’와 닮았다는 말을 들었다면 똑같은 반응을 보였을 거다. 그 괴벽한 노인이 목덜미부터 달아오르며 얼굴이 터질 듯 화내는 모습이 상상된다.
얼어 있던 미더덕이 물에 닿으며 녹진해진다. 한때는 이게 그렇게도 징그러웠지. 저 오돌토돌한 돌기도, 잘린 손가락을 연상케 하는 몸체도, 암수가 한몸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도. 닿기만 해도 몸서리치던 때가 있었는데 무뎌진 건지 익숙해진 건지 이제는 담담하다. 핏줄에게 가장 좋은 것만 쥐여주고 싶다는 욕심. 아이 앞에서 한없이 연약해지는 마음. 그런 면에서 시부와 나는 떼레야 뗄 수 없는 관계 아닐까. 애정으로 집요하게 얽혀 한몸이 되어가는 관계
-281p
모호해서 더 기묘한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내는 것. 뭔지 알아도 도통 알 수 없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모호하고 기묘한, 미더덕이란 생명체. 생각할수록 미궁으로 빠지게 하는 그것은 정말 서진을 둘러싼 ‘나’와 시부의 관계를 빼다 박았다.
시부는 분명 큰 원 안에 있었다. 중심에 있는 건 언제나 서진. 그 사이에 ‘나’가 있었다. 그러나 서진과 시부 간 일어나는 내밀한 감정적 연결은 끊어내지도, 막지도 못했다. 그는 항상 멈출 새 없이 서진이라는 태양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소행성과 같았다.
목성이 떠올랐다. 목성은 엄청난 크기 때문에 밖에서 오는 운석을 흡수해 버린다고 한다. 목성이 없었다면 지구에 운석이 떨어져 생명이 살 환경이 조성되지 못했을 거다. 그리고 시부가 그 바깥에 있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때로 지나치게 근접해 오다가도 절체절명의 순간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책임 소재에서 순진하게 벗어나 버리고는 태연히 원망의 화살을 피해 가는 그가, 서진과 ‘나’를 감싼 채 거기에 있었다.
<혼모노>
진짜와 가짜는 하늘과 땅처럼 명확한 별개일까. 혼란함보다 문란함에 가까운 사회에서 비판 정신도, 자기 의심도 잊어가는 인간의 무의식적 본성은 다르게 말하는 듯하다. 어쩌면 두 단어의 본래 정의는 물론 그것들을 가르는 기준조차도 이미 혼탁하며 각각 혼종적인 의미를 가진 지 오래됐다고. 유일한 방법은 그저 진실을 추구하는 정신을 잃지 않는 것뿐이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