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개월 만에 방문한 서울에서 타지인으로서 둘러본 도시는 소멸 직전의 장렬히 빛나는 별 같았다. 왜 많은 이들이 서울로 상경하려는 꿈을 가지는지 알 것 같았고 한때 나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졌다. 내게 서울은 이제 다시는 살고 싶지 않은 도시이기 때문이다.
뒤틀린 자리에 서면 몇 걸음 떼는 것조차 아슬아슬하다. 서울에서 5년간 사는 내내 나는 서커스 극단에서 퇴물로 방치된 채 사자 우리에 갇혀 외줄타기를 연습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잠시 머무는 지금, 가벼운 마음으로 이 슬픈 화려함에 선뜻 속아 넘어갈 수 있는지도 모른다.
서울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어떤 것들일까, 항상 궁금했다. 그들은 어떻게 이 도시의 폭풍우 같은 변화와 지독할 만큼 매일 피어나는 새로움에서 활력을 계속 얻을 수 있을까. 내가 감히 짐작할 수 있는 건 이 도시를 감당할 수 있는 이들에게는 어떤 치열한 열정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삶을 언제든 무너트릴 수 있는 위험 요소를 제때 차단하는 거름망이 있었다. 이들은 웬만한 일에도 잘 당황하지 않았고 능수능란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아니다. 어쨌든 이게 내가 생각하는 이들이 도시의 폭발적인 생명력을 남들보다 잘 소화할 수 있는 이유다. 그런데 나는 늘 허둥지둥했고 위축돼 있었다. 비단 내 삶을 오래 움켜쥐어 온 고질적인 문제와 그로 인한 책임감, 이따금 찾아오는 삶의 변덕 때문만은 아니었다. 5년간 그것들이 지칠 줄 모르고 자라나는 덩굴 숲속을 걷고 달리며 무던히 가지를 쳐냈으니 말이다.
지치고 길 잃은 대다수의 분노가 서린 무표정한 얼굴들, 어디로 향하는지는 모르지만 경쟁하듯 앞과 옆 사람을 가로지르고 제치며 바삐 발걸음을 재촉하는 이들. 그들은 툭 치면 설움과 실망, 절망, 원망이 무력하게 뒤틀린 채 장기처럼 쏟아져 나올 듯했다. 그런가 하면 건드리지 않아도 주변에 자신의 불행을 부스러기처럼 흩뿌리고 다니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런 게 나를 더 지치게 했다.
어떤 이들은 남의 길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지난한 세월이 묻은 오물과 진물 감았던 붕대로 가득 찬 배낭을 이고 진 채 온 힘을 다해 견디는 반면 그들은 여기저기 던짐으로써 불행을 누군가에게 지우고 가벼워지려 한다. 타 지역 사람들이 동경하는 모든 것이 아낌없이 집중된 서울에는 그런 이들이 옷깃만 스쳐도 마주칠 정도로 많다. 나는 이 도시가 베푸는 아량에 감사해야 할지 경계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여기서는 뭔가를 받으면 꼭 하나 이상 빼앗기는 기분이 들었다.
나처럼 서울과 친하지 않은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12년이 지난 지금도 노란 옷을 입고 노란 피켓을 든 채 거리에 나선 사람들, 보험사 앞에서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에 대한 진실을 홀로 외치는 사람, 몇 년째 지하철 안의 같은 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 이들이 있는 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각종 행사가 매주 열리는 것을 보고 있자면 트루먼쇼를 보는 듯했다. 알 수 없는 거부감이 몰려왔고 외출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서울에서 2시간 떨어진 소도시에 사는 지금 나는 그 모순에서 다소 해방됐다. 내가 사는 곳이 서울보다 작다고 해서 다르거나 낫다고 할 수는 없다. 가끔 거북함과 답답함을 느끼고 벗어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다만 적어도 여기서 살아가는 내 삶을 의심케 하는 일상적인 폭력의 빈도는 현저히 낮다. 이곳에서 삶은 훨씬 잔잔하게, 나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그럼에도 나는 또 어디로 옮길 궁리만 하고 있다. 어쩌면 돌고 돌아 서울로 다시 갈지도 모른다. 분명히 새로 옮길 곳에서도 아마 오래 머물지는 못 할 거다. 어딘가 정착해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 것이란 희망은 함부로 품지 않을 것이다. 희망을 버리는 건 아니다. 단지 더 자유롭게 헤엄치기 위해 자리를 계속 버려야 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게 됐을 뿐이다.



